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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K CLUB]

- 트라우마를 가진 여성 + SM +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

트라우마, SM의 대가? 인 무라카미 류의 소설답다. 개인적으로 나중에 개간된 버전인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의 커버아트 이미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 카카오 프로필 사진으로 했다가 어머니께 사진을 내리라는 통보를 받았던 추억? 이 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검색해 보시길)

 

미키의 등 한 곳에 뜨거운 촛농이 떨어진다. 그때까지는 장난치며 웃고 떠들던 그녀가, 웃지 않게 되고 달콤한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제어할 수 없는 것이 그녀의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 보인다. 촛농을 떨어뜨리고 있는 마리도 마스크 아래 미키의 표정을 상상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그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는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여자의 목소리와 자태에 나타난 수치와 아픔을 보고 우리는 그녀가 굴복했음을 안다. 타인이 굴복하는 것을 보는 것은 공포인 동시에 쾌락이기도 하다. 굴복한 인간은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려고 한다. 우리는 일곱 명의 모임을 MASK CLUB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주인인 니노미야가 그들 테이블에 스파클링 와인을 선물했다. 미키는 몹시 들떴다. 미키는 남자의 그런 행동에 약했다. 나도 같은 부류이다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미키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고, 나는 계부에게서 성적 학대를 받았다.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여자들이 모두 똑같은 경향을 갖는 것은 아닐 테지만, 미키와 나 같은 경우에는 남자와의 거리감을 잘 모른다. 우리 같은 여자에게 남자는 모두 기본적으로 음흉하며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선물 같은 것을 받으면 이상하게 그 거리감이 좁혀진다. 미키는 자라난 환경이 그리 유복하지 못했던 탓에, 레스토랑 주인이 스파클링 와인을 선물하거나 하는 속물적인 행위에 특히 약했다. 나라면 아마도 반발했을 것이다. 통속적인 사내라고 니노미야를 싫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에 미키처럼 들뜨는 것도 나처럼 반발하는 것도 결국 똑같은 심리다. 속물적인 레스토랑에서 주인이 스파클링 와인을 선물하면 순수하게 좋아하면 된다. 들뜰 필요도 없고 반발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은 남이 호감을 보이거나, 무시하는 행동에 과잉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남자가 항상 옆에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나한테는 그런 남자가 없었다. 어릴 때 내 옆에 있던 남자들은 내 몸을 이용했을 뿐, 나를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남자가 나를 받아들여 준다고 하는 개념을 잘 모른다.

MASK CLUB은 미묘한 균형을 가진 일종의 섹스 세러피 같은 것이다. 여기에 남자가 끼어들게 되면, 그 균형이 무너지며 , 남자와의 거리감을 모르는 우리들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나는 남자를 믿지 않았고, 마리나 쿠미코나 루미코나 시오리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에게 남자란 그저 돈을 얻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 전반에 비하면 SM은 편하다. 어차피 돈이 얽힌 게임이며 게임 중에 역할이 확실해서 편하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까 어떻게 하면 미움받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줘]

- 문득 얼마전에 감명 깊게 읽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이 떠올랐다. 1940년대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무라카미 류도 이 책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구절보다도 작가 후기가 인상 깊어 발췌한다.


지금까지 연애소설이라는 말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연애가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프랑스에서 확립되었다는 연애란 놈은 특권계급의 소유물로 일반 서민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연애소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대사회에는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으므로, 일반 남녀도 연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자유를 두려워하고, 낯설어한다. 누구든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자유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스토커가 되기도 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자유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모순된 감정을 가진다. 사실은 너무 가까이하고 싶은데, 괴롭고 불안해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한다. 그런 독특한 감정을 이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무라카미 류는 도대체?]

- 무라카미 류의 소설은 아니고, 9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영향력 있는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무라카미 류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 글을 모아놓은 글이다. 모르는 사람도 있었고, 아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돌아가신 신해철 님 의 감방에서 경험담이 제일 인상 깊었다.

 
포르노는 되지 않는다. 류의 주인공들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포르노 처럼 섹스를 위한 진행이 아닌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섹스이다. 그래서 섹스에 대한 묘사는 솔직하며 사건을 동반한다.

도시는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그들의 자리이며 결국 돌아갈 곳이다. 류는 '새'를 죽이고 싶어 하지만 새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일 수도 있다. 아시하라는 '적'이 있는 도시- 자신이 사는 도시를 파괴했다.

이 회색의 도시 속에서 '나'라는 인간의 고유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전체'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것에는 공포를 가진다. 적당히 묻히고 한편으론 적당히 돋보이면서... 항상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둘 것인가에 예민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간 양식인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개인주의적이라느니 하면서 덮어 버릴 것이 아닌 문제이다. 그들은 구시대의 히피와는 다르다. 실로 그들은 일견 그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함을 가지고 있다. 기존 정치 하드웨어 전복을 향해 돌을 던지던 세대와도 다르다. 그들은 그것보다는 조용히, 그리고 상처 받지 않으며 진행시키기를 원한다. 민중을 위해 돌을 던지고 몸에 불을 지르는 타오르는 혈기도,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부질없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서울이란 도시가 분단의 아픔이나 남북의 대치하에서 자유가 억압된 도시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지도 않았거니와 원치도 않았던 힘겨운 빚더미 유산을 물려받은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되면서 고립되어 가는 것이다. 이로 인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대하고 나아가 사랑해야 하는가도 모르게 만든다. 그들은 문제점을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거대 산업 사회라는 공룡에 붙어살려면 어쩔 수가 없으며 자기 하나가 공룡을 뒤집을 수 없기에 '적당히'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소비자 사회' 팝 아트 혹은 대중문화 '후기 산업 사회' 속에서 '고독한 군중'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적당한 포기'는 사실 자신을 죽임과 동시에 아끼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포기'라는 단어가 가진 부정적 느낌만을 가질 일이 아니다. '적당한 포기'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건강한 자율성의 허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국가에서 관여하는것은 잘못된 일이다.
세상에 태어난것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식적인 측면에서 나를 키워준 부모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파괴 욕구를 스스로 어느 정도 선까지 제어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부모를 부정하고싶거나 자신을 떠난, 혹은 무심해진 연인에 대한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불만이 일정 수준을 벗어나면 인간은 자기 파괴본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물론 정신적인 측면이 아닌 신체적 결함에서 오는 우울증이나 병,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를 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자해나 자살, 마약, 극단적 성적 쾌락을 쫓으며 스스로를 해하는 사람들의 경우, 파괴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들이 궁극적으로 영향을 행사하고자 하는 대상은 타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상처가 있는 사람이 좋다.
아니 상처가 없는 사람이 싫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거나 아니면 무섭게 자기를 방어해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한 인간이거나(결국 방어기제를 통해 상처를 막는 사람은 자기 기만이나 합리화로 빠지기 쉽겠지만) 그도 아니면 정말 지능이 낮아 상처를 받을 만한 수준도 못 되는 인간일 것이다.
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어떻게든 상처를 받는다.

가수로서 얻게되는 부와 명성의 기억보다
마약 복용으로 인해 감방에 들어가서 한 어머니와의 포웅, 한 번의 전화가 나에게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한국에서 마약이 합법화되어도 다시는 마약을 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약속했다. 역시 나는 류처럼 살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 어떤 것에도 완전하게 침몰하지 않고 겉돌았기에 세상의 모든 금지된 것에 대해 죄의식 없이 담담하게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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