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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에게 살아가려는 에로스적 충동과 죽으려는 타나토스적 충동이 동시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화 속에는 이 두 가지 충동이 어떤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고도 성장기의 일본 사회는 오로지 에로스의 힘을 추구하면서, 비합리적인 죽음의 세계와 비의적 문화 전통에 대해서는 무관심과 무지로 일관하고, 혁명적인 에너지는 거부해 버렸다. 깨끗하고, 산뜻하고 상승 지향적이고, 선진형의 고급스러운 문화를 편식하면서, 사회관계에서 히에라르키는 고착되어 갔다. 일본 사회의 뿌리내린 묘한 히에라르키 의식은, 사회(집단) 속에서 자신의 역할(연기)을 고정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분위기와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의식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금방 숨이 막혀 버릴 강철의 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타나토스는 거부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 오컬티즘(신비주의)이 대중적으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런 숨막히는 틀에 대한 저항과 반역이었을 것이다. 정치 투쟁을 벌이던 지식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동양 사상과 신비주의와 기공의 세계를 추구한 것도 그런 현상의 한 단편이 아니었을까.
무라카미 류는 그런 신비주의 세계로 가지는 않았다. 몇몇 문화인들이 아프리카를 원시적 힘과 생명력의 모태로서 창작의 세계에 도입할 때, 류는 쿠바를 도입했다. 쿠바는 노예 출신들의 나라이지만, 한편으로 인디언이 말살된 땅이기도 하다. 힘없이 죽어 가야 했던 인디언- 백인의 손에 잡혀온 아프리카 노예와 어떤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류는 그런 쿠바에서 태어난 음악에 대해 소설 속에서 자주 언급한다. 감상이 없는 쿠바의 리듬과 율동. 강렬한 원시적 힘과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이 밴 예술 감각. 쇳소리로 맑게 터져 나와 고막을 울리는 여성 보컬의 노래에 대해서도 말한다. 사쿠라이 레이코는 자신의 착란을 정리하기 위해 쿠바로 왔다. 그리고 가자마라는 젊은이를 만나 어떤 고백을 시작한다. 야하고 진득하고 병적인 고백을.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야자키와 몇몇 여자의 관계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말로 표현하면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레이코는 왜 쿠바에서 처음 만난 젊은 남자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그녀는 그 고백(이야기)을 다른 사람에게도 했을까, 그 고백은 미리 준비된 것이었을까. 소설 속의 가자마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 그 대답은 이렇다. 가자마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 고백을 할 계기, 즉 이야기를 들어줄 쿠바의 샤먼(정신 분석가)과 비슷한 역할을 해줄 존재를 만난 것이다. 그것은 가자마가 레이코에게 강력하면서도 묘한 아우라를 느끼고 가위눌린 듯이 그 여자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 유사한 어떤 느낌을 그녀가 가자마에게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은 여자의 내면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었지만 목소리를 타고 타인의 귀에 닿은 적이 과거에는 없었을 것이다. 즉 여자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지만,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쿠바에서 가자마를 만나기 전에는
그래서 쿠바는 이야기가 성립하는 장소이다. 여자는 내면의 쿠바로 침잠하여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그것을 터뜨릴 수 있는 현실 세계, 쿠바에서 들어 줄 사람(독자)을 비로소 만난 것이다. 이 프로세스에서 이야기의 제작자는 마조히스트이며 약자이고, 그 장소는 멸망과 노예의 당인 쿠바이다. 생각해 보면 가자마라는 존재 역시 일본 사회의 관계성을 떠나 어떤 다른 것(타나토스적 충동)을 찾아 쿠바로 온 젊은이가 아닌가. 여자는 가자마의 안내로 샤먼을 찾아간다. 그 샤먼은 진짜이다. 미래 예측을 판매하는 장사꾼이 아니다. 찾아오는 사람의 리얼한 모습을 그냥 드러내 보여 줄 따름이다. 레이코라는 이름의 여자 속에 있는 수많은 레이코 가운데 유일한 그녀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샤먼이다. 그 샤먼은 그 여자가 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육체마저도 파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여자는 마지막 순간에 와 있는 것이다. 그 여자는 고백하는 자는 될 수 있어도, 소설가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스스로 파멸의 프로그램을 내면에 심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가 소설가와 다른 점이 아닐까. 소설가는 그녀 사쿠라이 레이코의 타나토스 충동에 가자마의 냉철한 눈이나 샤먼의 눈이 결합될 때 비로소 가능한 직업일 것이다. 그녀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치유할 능력이 없다. 소설 속에서 류가 말하듯이, 진정한 치유는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워질 때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기억의 노예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샤푸리 야르 왕은 세상의 모든 여자를 저주하여 하룻밤만 지내고 나면 여자를 죽여 버린다. 셰헤라자데는 그 이상 성격인 왕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1001일 밤에 걸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셰헤라자데는 그 왕의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피를 말리며 살아날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왕이 내릴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그 이야기들은 그 과정에서 필연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왕은 여자를 증오하는 왕을 버리고 이야기꾼 셰헤리자데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리얼리티로 거듭 태어난다. 왕은 죽음을 지금 바로 여기에 가져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세혜라자데는 그 힘에 대해 무력한 약자이다. 이야기는 그런 약자가 만들어 낸다. 무라카미 류는 이 소설에서 그런 약자, 마이너리티가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내면의 쿠바로 내려가야 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한꺼번에 뒤엉켜 꿈들대는 그 장소에 닿아 본 의식이, 관계성의 현실로 부상하여 세계의 리얼리티를 규정하고 묘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려 할 때 이야기는 우뚝 일어서는 것이 아닐까. 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다산성도 거기서 오는 것이 아닐까.

 

- 요즘에는 번역자의 후기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도 번역자의 후기는 대부분 작가에 대한 찬사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은 후기를 짧게 남기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타나토스의 역자 후기는 인문학적으로 매우 매력적이고 깊은 통창력이 엿보이는 후기이다. 이 후기에는 일본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일본의 컬트문화에 대한 신선한 시각이 담겨있다. 또한 이 역자의 후기는 내가 좋아하는 B급감성의 감독 츠카모토 신야의 작품 세계관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여러모로 타나토스는 나에게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타나토스 같은 명작을 접할때면 그냥 죽을때 까지 이런 책들속에 파묻혀 평범하게 살아가는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소확행일까 아니면 값싼 자기만족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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