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타나토스]

- 소설의 중,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나는 쿠바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정을 가진 사람들, 하지만 계급사회 속에서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인지 보고싶다.

몇일 전에 쿠바에서 27년만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봤다. 결국, 어떠한 인종도 가난 앞에서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쿠바에 가고싶은 마음이 25% 정도 사라졌다.

 

나는 공황상태에 빠졌어요, 나는 울면서, 당신은 상처를 치유한다고 거드름을 피우지만 말이에요, 나와 그 남자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말이에요, 그 상처를, 누가 나에게 주었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잖아요, 당신이 준 거야, 당신이야, 나에게 상처를 준 건 당신이라고, 그런 식으로 도망치지 마, 너야, 네가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어, 나를 좋아한다고, 내가 소중하다고 말해 놓고 다른 여자를 SM 클럽에서 불러 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했잖아, 게이코를 칭찬하면서, 게이코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내 입과 항문에 사정했잖아,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상처를 입었는지 넌 몰라, 남자는 나를 데리고 바를 나섰어요, 미안해, 좀 취한 모양이야, 그렇게 웨이터에게 말하면서 나를 부축해 바를 벗어나 평소에 가던 그 호텔 스위트 룸으로 갔어요, 남자의 부축을 받은 채로 울면서 나는 내가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되어 버린 것을 알았어요. (남에게 행하는 폭력도 결국 일종의 의존이다.) 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나는 울음을 멈추지 않고 불평을 늘어놓았어요. 그 남자는 놀라고 있었어요.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나를 잃고 울며 발버둥 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생각해 보면 그 남자 앞에서나 다른 누구 앞에서도 또는 혼자서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풀어헤친 적은 없었거든요, 왠지 기분이 좋았다는 기억이 나요.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해 봤어요. 나는 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 남자는 왜 내가 그렇게 감정을 폭발시켰는지 모르는 것 같았어요. 알 리가 없었죠. 그건 그 남자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놀라면서도 그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아요. 오히려 기뻐한 것 같은 기억이 나요, 정말로 기뻐했어요, 분명히 기뻐했어요, 그 남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의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영향력이 구체적으로 상대에게 작용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좋은 거죠, 그러고는 금방 지겨워하는 거예요, 하기야 우리 같은 여자애들도 부서진 인형에 금방 싫증을 느끼잖아요? 상당한 애착이 없는 한 시간이 지나면 인형에 대해 싫증을 느끼잖아요? 그렇지만 그 남자는 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보이에게 독한 술을 가져오게 하더니 나더러 마시라고 하더군요, 나는 얇은 유리로 된 브랜디 글라스의 테두리를 너무 세차게 깨물어서 그만 입술을 베고 말았어요.

 

- 유리를 깨물어 입술에 피가 나는 여자. 영상화 하면 느낌이 있을 것 같다.

 

쿠바 사람은 일본인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가혹한 역사를 살아온 노예와 이민의 자손들이기 때문인데, 그 에너지는 혁명에 의하여 국가적으로 제어되고 있다. 개인의 역동적인 힘을 국가적인 힘으로 변환시켜 서바이벌의 무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20여 년을 산 일본은 개인의 역동적인 힘을 제압하여 집단의 통일을 이루어 내는 사회라서 서바이벌의 개념이 없다. 일본에 있을 때는 몰랐다. 다른 무엇과 비교하지 않으면 한 사회의 특징은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비로소 일본의 특수성이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살아남는다'는 것과는 무관하게 지낼 수 있다. 주위에서 인정해 주는 집단에 들어가기만 하면 프라이드와 가치관을 보장받을 수 있다. 쿠바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개인의 에너지가 일본에서는 거의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안쪽으로 향할 때, 어떤 경우는 그 사람을 공격한다. 자기가 자기를 좋아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존경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경멸한다,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태어난 일부의 일본인은 집단이 던져 주는 보장을 거부하고 개인적인 자기 보장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참을 수 없는 자기 혐오감에 빠지고 만다, 나 자신이 그랬기 때문에 잘 안다. 그때는 무의식이었지만, 일본을 떠나 다른 나라의 가치관에 젖어듦으로써 자기 혐오에서 해방되고자 했다. 여배우나 카타오카 게이코, 그리고 야자키라는 사내의 방법에는 내가 선택한 그런 방법 외에도 섹스와 직업이 얽혀 있다.

 

뭔가를 바라고 노력하면 어떤 것도 꿈이 아니라고, 아버지와 선생들은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잠도 자지 않고 칠기 공예품을 만들 수 있지만, 칠기나 공예품에 흥미가 없는 사람은 금방 포기하고 만다. 어버지와 어머니가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며칠 잠을 자지 않으면서 일을 해도 지겹지 않은 일을, 즉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면서도 노력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 자신의 일을 찾지 못했을 따름이다. 한 개인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느끼는 위기감을 우리는 재능이라고 부른다.

 

쿠바에서는 카르도소와 같은 인물이 존경받는다. 카르도소를 찾아가는 사람도 존경받고,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카르도소가 되지 못했다고 슬퍼하지도 않는다. 바텐더는 내게 그런 돈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웃었지만,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도, 겸연쩍은 웃음도, 자신을 속이는 웃음도 아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보통의 웃음이었다.

 

노력만 하면 이 세상에서 손에 넣지 못할 것이 없다. 일본에서는 그렇게 배웠다. 수험 시스템의 중심에 그런 사고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는 사람을 패배자라 한다. 패배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을 조장하여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을 시스템에 밀어 넣는다. 내 고등학교 동창 몇 명은 그런 패배감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다. 그들은 유전이니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니 면역 부전이니 하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게 무서워서 어쨌든 일본을 빠져나가자고 생각했다, 패배자를 만들어 내는 시스템이란 너무도 강력하여 내가 상대할 수 없다고 거의 포기하게 만들었다. 쿠바에서 나는 알았다. 뭔가를 바라고, 그것을 손에 넣을 힘이 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달리 즐거운 뭔가를 찾는 게 좋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단순하지만, 일본인이 깨닫기는 힘들다. 쿠바에서는 모두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

 

- 노력한다고 모든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류는 욜로를 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세대에게 듣기좋은 말을 하며 점수를 따려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나는 그의 말에서 어떤 위안을 얻곤 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