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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스]


사쿠라이 레이코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남자의 말을 전할 때, 처음에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하다가 금방 불쾌해졌다. 사쿠라이 레이코는 어린이 프로그램의 여자 사회자가 귀신이나 늑대가 사람 소리를 내듯이, '선생님'이라는 말을, 일부러 변형시켰다. 한순간의 유머는 되었지만, 금방 재미가 없어지더니 결국 악의적인 뉘앙스를 띠어 갔다.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한 내가 저주스러웠다. 왜 그 여자가 미쳐 버렸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사쿠라이 레이코는 악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악의는 누군가 타인을 겨냥하지 못하면 자신을 향한다. 사쿠라이 레이코는 '선생님'이라는 남자에 대해 강렬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아기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그 악의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물론 숨기지 못했다. 사실은 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쿠라아이 레이코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구도 나를 무시할 수 없다. 절대로 무시하게 내버려 두지 않갔다고 사쿠라이 레이코는 결의하고 있다. 지금, 나에 대해 결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여자는 늘 결의하며 살아가고 있다.

 

-히스테릭한 여자에 대한 소설을 읽고 싶다면,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어라.

외국어를 습득하려는 사람은 궁지에 몰린 놈들뿐이야, 우리들의 조상들이 한 일은, 물론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긴 새월이 필요했겠지만, 외국어 습득이 아니라 언어의 창조였어, 어떤 놈이 그런 짓을 했을까? 사냥을 하거나 불을 둘러싸고 있을 때는 말 따위는 필요 없어, 그럼 누가? 사형수나 노예들일 걸라고 난 생각해, 또는 태어나면서 불구였거나 약하거나 해서 사냥에 참가할 수 없었던 놈들일 거야, 기본적으로 변명이 필요했고, 그 변명으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놈들이야, 그것이 언어의 기원이라고 생각해, 이야기의 기원이기도 하고.

 

- 무라카미 류의 제일 큰 매력은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통찰력이다.


레이코에게
FAX 잘 받았어.
너는 '솔직히 마음이 가는 대로' 라고 썼는데, 그건 솔직히 편지가 아니야, 이것은 한때 충실하게 함께 일했고, 한때 같이 살았던 선배 남자의 마지막 제안, 최후의 애정 한 방울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래, 어리광 부리면 안 돼, 나는 이제야 조금 수수께끼를 풀었어. 왜 네가 나에게서 떠났는가 하는 나에게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수수께끼가 조금 풀린 거야, 나는 레이코의 퍼스트 프라이오리티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어. 영화나 스테이지 일인지, 연애나 남자인지, 아니면 생활의 안정인지, 또는 그 모든 것을 다 섞은 것인지, 이제야 알겠는데, 너의 최우선 사항은 너 자신이야. 보통 때는 감추어져 있지만, 위기 상황이 출현하면 너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해, 얼핏 보면 그것은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고 산뜻한 삶의 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없이 추악한 것이야. 왜 추악한가?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실체도 없는 것에 의존하는 허위를 인정해 버렸기 때문이야.
레이코, 자기 자신은 어디에도 없는 거야. 오로지 있는 것은, 일을 하는 나, 타인의 곁에 있는 나, 누군가에게 안기고 있는 나, 관계성 속에서 벌벌 떨고, 어느 한순간 환희에 떠는 나 뿐이야. 무인도를 생각해 봐. 추억에 잠겨 있을 때와 구조될 미래를 생각할 때 외에는,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돼, 나와 다시 일을 하고 싶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 인생은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야, 죽음을 받아들이듯이, 나는 너의 부재를 받아들였어, 우리는 어느 때부터 아무 관계도 없어, 너는 지금을 같이하는 사람과(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 나의 부재를 받아들여
                                                                                                                                                      
팩시밀리의 날짜는 1년쯤 전이었다. 나는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서, 모자 케이스 포켓에 꽂아 넣었다. 끝을 잡고 들어올리면, 너덜너덜해진 접은 부분이 잘려 버릴 것 같았다. 여배우는 수백 번이나 이 편지를 읽고서는 그것을 다시 접어서 포켓에 꽂아 두었을 것이다. 레이코라는 이름의 여배우는 오디션으로 아자키라는 남자에게 선택되어, 사육당하는 개처럼 그의 애인이 되었다가, 이윽고 야자키를 떠났는데, 그런데도 자유롭지 못하여, 다시 언젠가는 같이 일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써서 팩시밀리로 부쳤다. 그리고 야자키는 답장을 보냈다.

나의 부재를 받아들여.
나는 야자키라는 남자의 답장을 읽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다.

 

- 나의 부재를 받아들여. 짧은 문장 속에 큰 무게감이 느껴진다. 

상처(트라우마)에 대한 무라카미 류의 말과 연관성이 느껴진다. 상처또한 치유되거나 그로부터 도망칠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고 최대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뿐이다. 무라카미 류의 글은 때로는 냉혹하고 차가워 보일 때가 있지만, 그것은 그의 글에 통찰력이 깃들어 있고 논리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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