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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이었어 하고 야자키는 실망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무슨 대단한 말인 줄 알았는데. 나 자신에게는 가치가 없다는 생각보다 더 대단한 게 있다는 말씀이세요 하고 여배우는 야자키에게 물었다. 네에게는 가치 따위는 없는 거야 하고 야자키는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내게도 없어, 가치 있는 인간은 어디에도 없어, 누구든 대신할 수 있고,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뭘 해줄 수 없어, 거기서 출발하여 어떤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가 못해, 언젠가 타인에게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건 비열한 생각이야, 쓸데없어, 누군가에게 소용에 닿는 인간이란 어디에도 없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자유로운 거야.

 

-쓸모있는 인간은 없다. 가치있는 인간은 없다. 나는 무라카미 류의 가치관과 통찰은 존경하지만, 이러한 그의 말은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일수도 있지만, 가치있는 인간, 쓸모 있는 인간은 있다. 그 수가 압도적으로 적을 뿐이다. 

 

 

너는 나에게 뭐야

노예입니다.

너는 노예가 아니야

그럼 나는 선생님에게 뭔가요

적어도 노예는 아니야

진정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노예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 대화가 두 사람 사이에 필요했던 것일까.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것이, 해변이나 음악이나 섹스나 스포츠나 소설이나 여행이나 마약이 아닐까. 그런 지점까지 가 버린 인간에게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닐까? 소비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야자키와 여배우는 제로가 될 때까지 서로를 소비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결국에는 텅 빈 공허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끝도 없는 섹스와 마약의 여행을 한 것은 아닐까. 노예이기도 하다고 여배우가 말했을 때, 왜 야자키는 슬픈 표정을 지었을까.

 

존경할 수 있는 노예를 찾는 셈인데, 그런 건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조히스트는 유아로 돌아가서 이름이나 운동이나 의미나 인격을 방기하고 쾌락을 추구한다. 그것은 기만이다. 마조히스트는 자기애와 놀고 있을 따름이다. 자기 자신을 과학적으로 진심으로 미워하는 놈은 절대 마조히스트가 되지 않는다. 너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그 남자는 말했다.

 

너에게는 정말 두손 들었어하고 그 남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때, 실제로 눈물이 고여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런 장면은 처음 보는 터라, 이 남자는 지금 진심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어디였더라, 남자가 늘 머물던 아카사카의 호텔 스위트 룸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사실은, 그 남자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런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은 이따금 내 몸속에 그냥 들어와 버린다. 말이 정말로 몸 안으로 들어올 때의, 그 , 애널 섹스의 삽입과 비슷한 오한과 쾌락을 아세요? 말은, 페니스와 달라서, 입력되면 몸속에서 바이러스처럼 증식하기도 하고 변질되어 갑자기 소멸하기도 한다. 아니, 바이러스보다 기생충에 비슷할지도 모른다. 문득 기생충이 나와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파리의 도서관에서 사전을 뒤지며 조사해 본 적이 있다. 전문서밖에 없어서 거의 읽을 수도 없었지만, 숙주에 대해서는 좀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에키노코쿠스라는 기생충은 왜 사람만을 죽이고, 종숙주인 여우는 죽이지 않는지, 아세요? 사람은 에키노쿠스의 중간 숙주예요. 기생충은 종숙주가 죽어 버리면 자신도 죽기 때문에, 종숙주는 절대로 죽이지 않아요. 촌충의 종숙주는 사람인데, 촌충이 몇 미터 길이로 자라도 사람은 죽지 않아요. 에키노코쿠스 항목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중간 숙주인 사람 몸속에서 에키노쿠스는 유성 생식을 하지 않고 열심히 알만 낳아요. 뼈와 내장 틈새에서 에키노코쿠스의 알은 증식을 계속해요. 난 생각했어요. 그 남자의 말도 에키노코쿠스와 같은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의 종숙주가 아니라고. 나는 그 남자의 말의 중간 속주라고. 그래서 촌충처럼 자라서 자립하여 나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형체가 모호해지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의 그런 생각은 옳았아요. 에키노코쿠스의 알은 사람 몸속에서 거의 무한히 증식을 계속해요. 왜 수술로 제거할 수 없는지 아세요? 에키노코쿠스의 알을 감싸고 있는 막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알이 너무 많이 증식해서 내장이나 뼈 사이가 크게 부어오른 환자가 있어도 개복 수술을 할 수 없어요. 그것은 알을 감싸고 있는 막이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버리기 때문이에요. 그 막의 내부에는 수십만 개의 알이 가득 차 있어요. 막이 타지면 수십만 개의 알이 온몸으로 퍼져요. 그리고 그 알 하나하나가 무성 생식을 시작해서 부드러운 막의 보호를 받으며 팽창해 가는 거예요.

 

-에키노코쿠스라는 기생충에 대해 상상하니 소름이 끼친다. 하지만 흥미롭게 읽음.

 

 

어디서 그 말을 들었는지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뉴욕이었는지 파리였는지 아바나였는지 베를린이었는지 시칠리아였는지 탄지르였는지, 그 어디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전부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사라져 버린다. 말만 남는다.

 

일본에서 살아가려면 마약이 필요해. 좀더 히스테릭하게 변해 보는 것이 심리적 외상의 정체를 아는 데 도움이 될지 몰라, 전 세계가 너의 적이 된다 해도 나만은 네 편이야, 섹스는 처음부터 공정한 게임이 아니야, 젖은 시트 같은 여자였어, 너의 최우선 사항은 너 자신의 심리적 외상이야. 너는 너 자신보다 심리적 외상을 더 소중히 여기면서 그런 인간을 매력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는 게 편하니까 자신은 가족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사랑받고 자랐을 거야, 그놈들은 오줌이 아니라 배설물을 마신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마셔, 심리적 외상과 재능은 무관해, 모자를 좋아하는 것은 죽을 만큼 외롭기 때문이야, 춤을 출 때 얼굴을 들고 어깨의 힘을 빼, 너는 너 자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주니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거야.

 

여배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팔에 까만게 붙어 있는데 제 손으로 그린 건가? 하고 야자키가 물었다. 여배우는 깜짝 놀랐다. 처음 듣는 목소리여서가 아니라, 팔에 그려진 문자를 야자키가 보았기 때문이었다. 소매가 긴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 제가 그렸습니다.

여배우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주의 깊게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야자키의 목소리가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방 안 공기를 울렸다. 무슨 글자? 최후라는 글자를 그렸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 여배우는 얼굴을 붉혔다. 야자키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뭐가 최후라는 거지? 야자키는 따지듯이 물었다. 이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댄스고 배우고 다 그만둘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오늘이, 최후의 날이라고 마음속으로 정했습니다. 여배우의 말을 듣고 야자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배우가 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에 야자키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이 최초의 날인지도 모르잖아.

 

- 팔에 '최후' 라고 적은 여자. 그것에서 '최초'를 발견한 남자. 류의 소설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지만 때론 낭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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