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으로 무라카미 류 보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길지 의문이다.
20대 초반부터 중, 후반까지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빠져 있었고,
20대 중, 후반부터 지금까지는 무라카미 류에 푹 빠져있다.
하루키는 퇴폐적 낭만주의와 회의주의가 고급진 느낌을 줘서 좋아했고 그와 반대로 그의 수필이나 단편은 귀여워서 좋아했다. (물론 지금도 no.2 작가이다.)
반면에 무라카미 류는 트라우마에 대한 그의 철학이나 예술과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그의 신념과 가치관, 통찰력을 좋아한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는 그가 똑똑해서 좋다.
하지만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접하면서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 그건 바로 그의 작품들이 갖는 '형식의 유연함'이다.
그가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작가(소설가, MC, 영화감독, CF 감독.. 등)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 형식의 유연함이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 형식의 유연성은 그의 천재성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이라는 작품은 형식의 유연함이 유독 잘 드러난 작품이다.
각 챕터의 이름은 재즈의 제목이고, 각 챕터는 해당 재즈곡의 노래 가사가 등장하는 옴니버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면 이러한 옴니버스식 구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물론 옴니버스라 해도 '환상의 재즈바'를 찾는다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일반 소설과 옴니버스의 중간 정도의 형식을 띄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개별 된 에피소드들은 점차 연결성을 갖는 일반 소설처럼 형식이 변화하고 막바지에는 SF에나 나올법한 반전도 등장한다. 물론 엔딩에서는 막말로 '아 ㅅㅂ꿈' 같은 클리세적인 결말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만, 바로 그 직전 챕터를 읽었을 때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형식 자체를 뒤 흔드는 이야기의 반전에 기분 좋은 충격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은 연애소설로 읽어도 재미있고 재즈와 친해지기에도 좋은 책이다. 나처럼 어떤 사람들은 이 소설이 갖는 형식의 유연함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무라카미 류 -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 명대사 PART 1
각 쳅터의 제목은 제즈 제목이기도 하다.
(어떻게 지내요?)
"실은 어떤 여자가 이 가게에 들어오는 걸 봤어. 게이라는 여잔데 음반회사의 홍보직원이야. 미인이고 솔직하고, 순종적이라는 단어에 가슴과 엉덩이를 붙여놓은 듯한, 지금 이 나라에선 거의 무형문화재에 가까운 좋은 여자야. 3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네 번째 정부였지.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한 달 동안 내버려 둬도 전화도 안 하고 잔소리 한 번 하지 않았지. 다른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아무 때고 불러내도, 심지어 한밤중에 라도 그녀는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한껏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검은 실크 속옷을 입고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곤 했어.
다섯 번째 정부가 생겼는데 그 녀석은 말도 못 하게 제멋대로 생겨먹은 아이였어. 당연히 게이를 멀리하게 되었지. 그런 시기가 거의 반년이나 계속되었어. 그런데 게이는 얌전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런 여자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좀 무서운걸!
"아냐, 무서워할 게 아니라고, 정말 좋은 아이야. 도덕심과 자제심이 없는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는 여신과도 같은 존재지. 하지만 어떤 응석이든 다 받아주니까 자극적이진 못했지. 아무튼 자연스레 나는 그녀를 찬 꼴이 되었어. 신과 같은 존재는 재미없잖아."
배가 불렀군, 지옥에 떨어질 거야
"그래, 지금 떨어져 있잖아. 아니 오해하지 몰아줘.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같은 짓은 안 해. 나는 4일 전에 게이가 남자를 데리고 이 가게에 들어오는 걸 봤어. 팔짱을 끼고 둘어서 웃고 있더군."
그게 어쨌다는 소리야? 새로운 남자 정도는 생기겠지. 미인이었다며?
"게이를 봤던 날 밤, 장소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 이상한 재즈바에 들어갔지. 여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하나도 안 변했군요
그때보다도 더 멋있는 것 같네요
소문으로 들리던 새로운 사람과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그때부터 한 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만나서 다행이에요
오랜만에 만나 봐도
나는 변함없이 재미없죠?
미안해요, 당신은 뭐랄까
그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느껴지네요
갑자기 말을 걸어서 미안해요
물론 당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제 기분은 변하지 않았어요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제가 쓸쓸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쓸쓸하지 않아요
저는........... 혼자가 아니에요.
- 지금 같은 시대에 소설에 이런 구절을 적는다면 몇몇 여성분들이 엄청 불쾌해할 것 같다. 출판된 지 30년이 넘은 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남녀노소를 떠나 자신에게 헌신적이고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그런 사랑이 질리면 다시 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기 마련이지만.. 그래서 사랑은 어려운 것 같다.
(버드나무여, 날 위해 울어 주렴)
"동창회 때 나는 자가용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 휴일에는 플로리다에 가고 좀 긴 휴가 때는 키리브 해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의 반응이란 게 다른 녀석들은 질투나 존경, 그 둘 가운데 한쪽으로 치우쳐버리더군. 하지만 자네만은 질투와 존경 사이의 같은 거리에 있었지. 물론 이건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말이야.
애정 어린 무관심이란 말인가?
- 적당한 관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면 그 사람은 그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나의 즐거운 발렌타인)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대신해서 그림이나 음악이 스며드는 것.
-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 그것이 청춘이던 사랑이던 어떠한 인생에 어떠한 사건이나 시기가 이정표처럼 자리 잡으면 인간은 그것을 기리기 위해 무언가를 그것과 결부시키게 된다. 그래서 음악과 영화 시와 소설, 예술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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